정주행 이유
변호사 쉬헐크는 마블의 새로운 시도를 담은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로, 기존의 슈퍼히어로 서사에 법정 코미디를 결합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다. 제니퍼 월터스라는 변호사가 우연한 사고로 헐크의 힘을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법과 정의를 다루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작 초기부터 ‘마블 최초의 법정 시트콤’이라는 콘셉트로 주목받았으며, 4차원적인 메타 유머와 여성 중심 히어로의 시선을 강조했다. 정주행의 이유를 찾자면, 마블 세계관 안에서 새로운 장르 결합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물은 기대와 달리 개연성 부족과 방향성 상실로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개연성 파괴와 설정 붕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개연성의 부재다. 주인공이 초능력을 얻게 되는 과정부터 이미 성급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로 시작한다. 원작에서는 오랜 서사와 사고 경위를 통해 변화를 설득하지만, 여기서는 몇 분 만에 초능력 습득과 활용이 단순하게 끝난다. 사건 해결 과정도 마찬가지다. 법정 장면에서 증거 제시와 논리적 공방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설정과 황당한 해결책으로 사건이 마무리된다. 히어로물에서 필수적인 ‘왜 이 인물이 싸우는가’라는 동기도 흐릿해져, 캐릭터가 세계관 속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결국 관객은 이야기에 몰입하기보다, 장면마다 튀어나오는 무리한 전개에 집중하게 된다.
히어로 영화 기틀의 무시
히어로 영화의 철학적 기틀은 힘과 책임이다. 능력을 얻은 주인공은 그 힘을 어떻게 쓰고, 어떤 책임을 지는지가 서사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변호사 쉬헐크에서는 이 기틀이 거의 무시된다. 제니퍼는 능력을 얻게 된 이후에도 히어로로서의 책임보다는 개인적 편의나 사적인 상황 해결에 능력을 사용한다. 물론 일상과 초능력을 결합한 설정 자체는 신선할 수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깊이 있는 서사가 부재하다. 그 결과, 관객이 히어로의 성장과 내적 갈등을 느낄 기회가 줄어든다. 마블 팬들이 기대하는 ‘영웅 서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은 큰 결점이다.
흥미를 주지 못한 스토리와 전개
이야기의 큰 줄기가 없다시피 한 전개는 시리즈 내내 흥미를 떨어뜨린다. 각 에피소드가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나쁘지 않지만, 이를 하나의 큰 서사로 묶는 장치가 부족하다. 악역의 등장과 갈등 구조도 단편적이며, 결말부의 반전 역시 준비 과정 없이 급하게 마무리된다. 결국 시청자는 매 회차를 봐도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결말에 다다랐을 때 남는 것은 빈약한 여운뿐이다. 스토리의 중심축이 약하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나 개별 장면이 돋보여도 전체적인 완성도로 이어지지 못한다.
개그와 메타 연출의 과잉
변호사 쉬헐크는 메타 유머와 벽을 깨는 연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주인공이 화면 밖의 제작진이나 시청자와 대화하는 설정은 잠깐의 신선함을 주지만, 반복되면서 서사의 몰입을 방해한다. 특히 결말부에서 대형 사건의 해결을 메타 연출로 단순화시킨 선택은, 오랫동안 쌓아야 할 긴장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코미디가 주 장르가 아니라면, 웃음과 긴장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지만 이 작품은 웃음을 위해 서사를 희생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로 인해 극의 무게와 감정적 흐름이 끊기고, 시청자는 장난처럼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진지한 메시지를 찾기 어렵다.
법정물과 히어로물의 실패한 결합
법정물은 논리와 설득이 핵심이고, 히어로물은 액션과 책임이 중심이다. 변호사 쉬헐크는 이 두 장르를 합치려 했지만, 어느 쪽에서도 완성도를 확보하지 못했다. 법정 장면에서는 법률적 사실성과 리얼리티가 부족했고, 히어로 장면에서는 전투와 긴장감이 지나치게 단순했다. 이 두 요소가 시너지를 내기보다는 서로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장르 혼합은 시도 자체가 가치 있지만,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각 장르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설계가 필요하다.
총평과 등급
변호사 쉬헐크는 새로운 장르 결합과 여성 중심 서사를 시도했지만, 개연성 부족과 서사 구조의 약함, 그리고 히어로물의 기틀 부재로 완성도가 낮았다. 메타 유머와 코미디가 잠시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반복과 과잉은 결국 몰입을 깨뜨렸다. 법정물과 히어로물의 결합이라는 큰 아이디어는 있었으나, 이를 설득력 있게 구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팬들에게는 세계관 속 한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있지만, 독립적인 드라마로서의 매력은 부족하다.
등급: D
한 줄 평: 웃기려다 잃은 건 개연성과 책임, 남은 건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